* 노년이 이전 삶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패러디가 되지 않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목표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 예컨대 개인이나 공동체, 사회단체 혹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지적이거나 창조적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 대부분 젊을 때는 잘 살았으나. 이제는 사는 것도 아닌 듯이 화를 내지요. 어떤 사람은 가족의 불손한 태도에 탄식합니다. 온갖 불행의 탓이 노령이라며 나이 타령을 합니다. 하지만 그건 노령이 아니라, 성격의 문제입니다. 분별력이 있으면, 노년은 견뎌내기 쉽기 때문이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노년뿐 아니라 청춘도 견디기 힘들겁니다.
* 젊음이 새로움과 항상 같은 것은 아니듯이 늙음과 낡음도 같지 않다. 중요한 것은 도전하는 마음과 열린태도를 얼마나 지녔는가 하는 문제이며, 신체적인 변화가 새로움과 낡음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젊음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가까 젊음이 아니라 진짜 젊음을 추구해야 한다. 날로 새로워지고 날로 도전하는 정신의 젊음 말이다.
* 사회는 끊임없이 고속기차 속도에 사회구성원 개인이 적응하도록 요구한다. 속도를 못 따라오면 경쟁력이 부족한 사람이고 결국 뒤처지거나 탈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개인의 노력 부족이 문제이기에 스스로 곤궁한 삶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한창 나이일 대도 견디기 어려운 속도와 강도를 노년이 되어도 유지하라고 한다. 현대인의 삶, 특히 노인의 삶이 행복해지려면 갈수록 강화되는 노동의 윤리에서 벗어나냐 한다. 사회가 강제하는 노동의 윤리에 적응하기보다는 이를 거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죽음에 내던져져 있음이 현존재에게 더 근원적이고 더 절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불안에 처해 있음에서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향한 존재는, 죽음이 이 존재 안에서 그리고 이 존재에 대해 가능성으로서 드러나도록 그렇게 죽음에 대해 관계해야 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향한 존재를 용어상 가능성으로 '미리 달려가 봄'이라고 파악한다.
* 어쩔 수 없이 몸이 늙는다고 해서 훌륭한 삶을 영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가령 병석에 누워 있거나 휠체어에 앉아서도 우리는 제 나름대로의 특별한 방법으로 크고 작은 기여를 할 수 잇다. 우리는 파괴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주변의 일들을 다룰 수 있다.
*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삶의 기쁨은 이성보다는 감성으로부터 온다. 조물주는 인간의 삶이 슬프고 지루하지 않도록 이성보다 정열을 더 많이 주었다. 그것도 다소 앞서는 정도가 아니라 두배 이상은 정열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