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의 대상과 상실감은 시간이 흐른다고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가 애도라는 힘겨운 감정 노동을 통해서 그 강한 억압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 상실의 슬픔은 대단히 사적인 경험이며 슬픔이기에 사적인 애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똑같은 감정으로 표준화하여 진행될 수 없겠지요. 저마다 다른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자신을 또 상대를 포용하고 기다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슬픔에는 끝이 없고, 사랑에도 끝이 없음을 슬픔을 통해 이제 알았기때문입니다.슬픔의 진행 과정으 예측 불가능하죠. 몇주, 몆달, 몇년이 지나든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슬픔이 들이닥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바삐 서둘러, 잊으라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서둘러, 잊지 않아도 됩니다.
* 애도는 필수불가결한 생존의 기술입니다. 애도는 살아남아서 계속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마땅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상실의 감정은 훗날의 삶과 관계를 나도 모르는 채로 왜곡할 수 있습니다.
* 전문가들은 애도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을 실천하는 노동이라고 합니다. "슬픔이 하나의 정서라면, 통곡은 하나의 노동, 슬픔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게 해주는 노동"이라고 맹정현 박사는 말했습니다. "애도를 통해 대상과 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런 점에서 애도는 인간이 성숙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삶은 철저히 일회성의 법칙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인정해야 함을, 그 상실을 결코 되돌려 놓을 수 없으며 그 아픔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돌려 세울수는 없었지만, 돌려세우고 싶었던 마음의 흔적 찾기를 통해 떠나간 이가 품었던 삶의 이면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는 살고 결국 떠납니다. 이후, 또 다른 우리가 다시 삶이라는 플렛폼에 배치되어 살고 또 다른 우리가 그 플랫폼을 다시 또 떠나겠지요.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수억 번 이상의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 타자로 향하는 움직임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존재함을 인식하며 타인의 슬픔에 대해 애도하는 사회문화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너의 죽음을 애도하는 순간, '나'의 죽음 역시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잇다는 것, 당신에게로 향하는 애도인 동시에 그 죽음을 함께 나누는 '나'에 대한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모두의 애도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도는 필수불가결한 생존의 가치로, 필사적 회복의 움직임으로 안타까운 죽음과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추동해가는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 죽은자는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지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합니다.
* 애도는 언어라는 플랫폼없이는 대단히 어려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영화, 그림, 무용등도 그것을 설명할 대는 다시 언어의 영여긍로 끌어내게 됩니다. 자신의 상실감을 뒤로 던져두고 회피하는 것에서 좀더 주체적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은 삶의 통찰를 얻어나가는 성장을 겪으며 비탄의감정으로부터 빠져나가는 회복의 문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마음의 껍질이 벗겨지고, 하얗게 각질이 일어나도, 더 없이 외로워 보여도, 서로에게 기대어 다시 거대한 삶의 길을 이루어 나갈 겁니다. 진정한 위로와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은 그 흔한 사람들도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