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불안과 완벽주의>에 관한 임상심리학자의 이야기
완벽주의자는 대체로 ‘적당한’ 수준을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완벽주의는 불현듯 갖가지 형태의 신체적, 정신적 병리에 기여합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성피로증후군’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진단을 받은 환자들의 일상을 추적해보면 자기비판적인 완벽주의가 결국 매일의 짜증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매우 위험한 수준의 스트레스 민감성과 우울,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실패감, 죄책감, 수치심, 낮은 자존감 같은 감정들은 결국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염려와 뒤엉켜서 우리를 자꾸만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자기평가나 그와 관련된 정서를 ‘공적 자의식public self-consciousness’으로 분류합니다.
물론 자부심 같은 긍정적 정서도 있지만, 수치심이나 죄책감 같은 부정적 자의식 정서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대인관계에서 ‘너무 긴장하다 못해 토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고, 한번 이런 생각에 압도되면 상당기간 동안 우울과 불안을 경험한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제는 자의식 ‘정서’가 아닌 완벽주의와 관련된 잘못된 ‘생각’입니다. 연구 데이터에서 완벽주의적인 특성을 통계적으로 제거하면 자의식 정서가 우울이나 불안에 미치는 영향이 함께 사라집니다. ‘완벽주의, 자의식, 불안’이라는 제목의 연구가 1997년에 발표된 이후 여러 차례 검증된 부분입니다.
즉 문제의 기원은 어쩌면 ‘나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묶어 버리는 완벽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양육 과정에서 우리에게 지나치게 높이 부과된 기준과 그 때문에 너무 견고해진 초자아superego, 그리고 원가족과의 역동에 따른 죄책감이나 열등감은 우리를 지나치게 ‘애쓰게’ 만듭니다.
친구나 애인, 가족이나 직장동료, 그 밖에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좋아하는 대상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어야 합니다.
‘그 모든 소망은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것들이었는데, 그나마 나를 돌볼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내가 그 일을 해내면 좋겠지만, 아니면 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마음에 들면 좋겠지만, 아니면 마는 것입니다.
이번의 시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좋겠지만, 아니면 또 마는 것입니다.
어쩌다 나의 노력 덕분에 일이 잘 된다면, 나는 작은 자기 효능감 하나를 챙기고 다음 일을 도모하면 됩니다.
만약 안된다면? 그러면, 그냥 마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내가 불행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다 한 후에 ‘그래서 어쩌라고?’ 정신으로 다른 노력을 찾아내어 즐기면 됩니다. 그때 당신을 가장 순수하게 행복하게 해줄 일을 찾으면 좋습니다.
혼자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는 것, 나만의 글을 쓰는 것, 맛있는 드립 커피를 내리는 것, 아무 일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 SNS 친구들과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 그 어떤 완벽주의도 개입할 여지가 없는 ‘기쁨의 목록’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며, 느닷없는 불행과 거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매일 조금씩 허무를 이기고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100퍼센트 완벽해질 필요도 없고 뭔가를 성취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성과들이 나의 존엄성과 가치에 큰 의미가 있긴 할까요? 살아온 그 수십만의 시간동안 우리는 언제나 완벽하게 살아있었습니다. 0도, 0.5도 아닌 1로서 계속해서 존재해 왔습니다.
괜찮아요. 충분해요.
이렇게까지 애쓰지 맙시다.
♣오늘의 숙제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왜 굳이 완벽해지길 원했던 것인지, 그 기원을 찾아볼 것
그 역기능적인 완벽주의가 어떻게 당신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고, 멋대로 당신의 마음을 찔러왔는지 살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당신으로서 순진하게 행복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목록을 적어볼 것
이번 주에는 두어 시간 정도 짬을 내어 그 일들에 집중해보고, 당신을 안심시켜주세요. 작은 선물이라도 좀 사서 자신에게 들려보내세요. 우리는 매일의 불안과 허무를 이겨내며 그럭저럭 잘 살아왔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허지원 지음, 홍익출판사, 2018)에서 발췌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