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리고, 분노하고, 비어있는 자아
<외현적 자존감과 내현적 자존감>에 관한 임상심리학자의 이야기
외현적 자존감과 내현적 자존감이 동시에 높은 ‘안정적인 자존감’의 소유자들이 있을까요? 성인군자 반열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겠지요. 하지만 저나, 우리는, 아닐겁니다.
밖으로 보이는 외현적 자존감은 너무나 낮지만, 웬일인지 암묵적인 내현적 자존감이 꽤나 높은 상태를 ‘손상된 자존감’ 유형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꽤나 괜찮아 보이는데 의외로 내현적 자존감이 형편없는 상태를 ‘취약한 자존감’ 유형이라 부릅니다.
이 두 가지 자존감은 다소 다른 방향으로 발현되지만, 상당한 분노를 마음 깊이 꾹꾹 누르며 억압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두 자존감이 보이는 문제의 양상은 아주 다릅니다.
‘손상된 자존감’ 유형을 보자면, 자살 충동이 있는 우울증 환자나 신경성 폭식증 환자인 경우들 중에 의외로 내현적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현적 자존감이 손상되어 겉에서 보기에는 위축되어 있지만 스스로를 살리기 위한 방책이자 자구책으로 내현적 자존감을 높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안과 우울로 마음이 짓눌리면서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불필요하게 높이 유지되는 내현적 자존감은 ‘내가 이 정도는 달성해야지!’ 또는 ‘내가 이 정도 체중은 유지해야지!’ 하는 완벽주의나, ‘세상의 비난은 내가 더 잘 되기 위한 밑거름이야!’ 따위의 정신적 승리감을 찾게 만듭니다. 하지만 높은 내현적 자존감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가 한없이 높이 설정한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번번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악순환을 되풀이합니다.
‘취약한 자존감’ 유형은 겉으로 보이는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달리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은 외부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들의 뼈대없이 와들와들 움직이는 가냘프고 불안정한 내현적 자존감은 어린 시절 주양육자의 변덕스럽고 일관성없는 양육방식 같은 부정적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여러 형태의 성취를 이뤄오면서 그나마 외현적 자존감은 차츰 높여 왔으나외부의 갑작스러운 위협에 직면하게 되면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타인을 마구 경멸하고 무시하며 비난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세상이 자신의 태도에 반응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외현적 자기애는 점점 높아지고 자아는 과다할 정도로 팽창하게 됩니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오토 컨버그는 이렇게 과다한 자기애를 ‘굶주라고 분노하고 비어있는 자아a hungry, enraged, empty self’에서 벗어나려는 학습된 방어태세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취약한 자존감’ 유형은 어느 자존감 유형보다도 외부 평판에 민감하여 자신에 대한 피드백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조리 반응하려 듭니다.
이 두 가지 자존감 유형에서 파생되는 고질적인 문제들 가운데 각각 하나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손상된 자존감’ 유형은 내면의 분노감을 숨기려는 의도에 따라 앞서 말한 반동 형성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좋은데 이를 숨기려고 괜스레 장난을 치거나 어떤 선배가 미워죽겠어도 이를 은폐하려 과도하게 칭찬하거나, 아예 무조건 복종하는 태도를 취하는 식입니다.
당신이 늘 네네, 하며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말투, 입에 발린 칭찬, 지나치게 머리를 조아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해봐야 합니다. 정말로 당신은 그 사람을 존경하고 있나요? 그 사람은 그렇게 칭찬을 들을만한 사람인가요? 그렇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까지 자기를 낮추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고는 또다시 기진맥진해 하거나 불쾌해 하고 있나요?
한편, ‘취약한 자존감’ 유형은 내면의 분노감을 숨긴 채 타인에게 관대한 척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타인의 중립적인 행동이나 말이 자신을 뒤흔들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는 근거 없는 의심에 꽂히게 되면 즉시 은밀히 반격을 시작합니다. 반격은 언제나 지나치기에, 뒤늦게 후회하는 일도 반복됩니다. 고통스러운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네가 왜 그렇게 갑자기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두세 차례 이상 들어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분개와 격노가 시작되려는 그 시점에서 그런 식의 분노 폭발이 적절했는지 곱씹어봐야 합니다. 우리의 내현적 자존감이 안녕하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팍으로 높은 자존감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 타이밍에 화를 낼지 시뮬레이션을 해본 후에 분노의 수위 조절은 물론이고 그 시점에서 분노 폭발을 개시할지를 다시금 결정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주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날카로운 방어가 올라오는 패턴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끼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그때엔 오토 컨버그가 아니라 오토 컨버그 할아버지라도 우리를 구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숙제는 다음의 질문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자존감은 어떻습니까?”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허지원 지음, 홍익출판사, 2018)에서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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